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학 농민 혁명 (문단 편집) ==== 황토현 전투 ==== ||[[파일: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동학혁명기념관).jpg|width=300]]|| ||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 || 당황한 조정에서는 이용태를 파면하고 귀양 보낸 후 [[홍계훈]][*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 민씨]]를 구하고 [[을미사변]] 때 시위대로서 근무하여 민씨를 보호하다 살해당한 그 홍계훈 맞다.]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8백명의 경군(京軍)[* 친군장위영(親軍將衛營) 병력과 친군심영(親軍沁營) 병력.]을 주어 전봉준의 동학군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그 당시 홍계훈의 경군은 해상로를 통해 [[인천]] [[제물포]]를 출발해 [[군산]]에 상륙하여 전주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때 경군이 소유하던 무기들이 이 당시로선 상당히 고급이었는데, [[독일]]제 [[마우저]] 소총과 크루프/티센크루프식 야포와 [[미국]] 레밍턴 롤링블록 소총, 그리고 결정적으로 '''[[개틀링 기관총|회선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충분히 관군 수준에서 농민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는 말. ||[[파일:황토현 전적비.jpg|width=300]]|| || 황토현 전적비 || 한편 전라 감사 김문현은 전라 감영군을 모아놓고 대기 중인 상태였다. 화력이 우수한 경군이 남하하고 있었으나, 김문현은 단독으로 공을 세울 욕심을 갖고 무리하게 출병한다. 특히 김문현은 수령으로써 잘못된 통치로 봉기를 허용한 죄가 있기 때문에 공을 세워서 지금까지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서기 1894년 음력 4월 6일 오후 2시, 황토현에 진을 친 동학군은 전라 감영군과 향병들을 상대로 접전을 벌이고 전봉준의 동학군은 관군과의 전투 끝에 기만적 후퇴로 황토현 인근 사시봉에서 진을 치고 훗날을 도모하자, 관군은 동학군이 기만을 위한 후퇴를 했다는 것도 모른 채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다. 그러나 4월 7일 새벽 4시, 동학군의 후퇴로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감영군과 친군무남영의[* 전주에 주둔하던 친군영으로, 동학 혁명 발발 당시 불과 몇 달 전에 신설된 부대라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정원수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병력이 기세등등한 동학군에게 기습을 당해 일거에 무너지자 관군들은 혼란에 빠진다. 다음날 아침 오전 6시, 전봉준이 지휘하는 호남 창의군의 총공격으로 인해 영관 이경호가 전사하고 그가 지휘하던 전라 감영군은 전멸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